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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서울 가볼만한곳 추천, 창덕궁 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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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날짜: 2020년 5월 12일

 

처음으로 창덕궁을 간 건 1995년 아니면 1996년쯤 된 것 같다. 그 당시에는 후원이 일반인에게 개방이 되지 않았다. 이유는 후원에 있는 희귀한 식물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지금은 이 곳이 일반인에게 개방이 되어 온라인 예약을 하거나 현장에서 예매하여 입장하여 볼 수 있는데 가이드와 함께 그룹으로 설명을 들으며 관람할 수 있다. 내가 갔을 때는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가이드가 없었고 표만 사면 개인이 혼자 자유롭게 다니면서 관람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설명을 들을 수 없어서 아쉽지만 혼자 보고 싶은 곳을 자유롭게 다니면서 사진을 찍을 수 있어서 너무나 좋았다. 후원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소는 옥류천인데 3월에서 6월과 9월에서 11월까지는 후원에 있는 옥류천을 가볼 수 있지만 이외에 다른 달에는 옥류천을 볼 수 없다. 지금이 가볼 수 있는 좋은 시기가 이닌가 싶다.

 

옥류천에 있는 농산정

주차

창덕궁 주차장은 영구 폐쇄됐기 때문에 주변에 있는 주차장을 이용해야한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을 추천.

대중교통

전철 3호선 안국역에서 3번 출구로 나와서 5분 정도 걸으면 된다.

관람 시간

궁궐 전각

2~5월

09:00-18:00(입장 마감은 17:00)

6~8월

09:00-18:30(입장 마감은 17:30)

9~10월

09:00-18:00(입장 마감은 17:00)

11~1월

09:00-17:30(입장 마감은 16:30)

후원

2월

10:00-17:00(입장 마감은 15:30)

3~5월

10:00-17:30(입장 마감은 16:00)

6~8월

10:00-18:00(입장 마감은 16:30)

9월~10월

10:00-17:30(입장 마감은 16:00)

11월

10:00-17:00(입장 마감은 15:30)

12~1월

10:00-16:30(입장 마감은 15:00)

입장료

궁궐 입장료와 후원 입장료는 따로 내야 되는데 만 25세~만 64세 성인만 따로 내고 나머지 초등학생부터 대학생, 만 65세 이상인 분은 후원 입장료만 내면 궁궐 관람은 무료이다. 한복을 입으면 무료입장 가능하다.

 

궁궐 전각

대인(만 25세~만 64세):3000

 

무료:

6 이하 어린이, 7~24 이하 청소년, 65 이상 국민

 

후원

만 7세-만 18세: 2500원(+전각 요금)

대인(만 19세~만 24세): 5000원(+전각 요금)

대인(만 25세~만 64세): 5,000원(+전각 요금 3,000)

경로(만 65세 이상): 5,000 (+전각 요금)

인정전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등 중요한 국가적 의식을 치르던 곳이다. 경복궁의 근정전은 보기만 해도 보는 이로 하여금 기압 하는 뭔가가 느껴지는데 이곳은 거기에 비하면 소박한 편이다. 1908년에 서양식으로 개조가 되어 전등, 커튼, 유리창문 등으로 화려하게 바꾸어 놓았다.  임진왜란 때 없어졌다가 광해군 때 다시 지어졌고 순조 때 없어졌다 다음 해 1804년에 다시 지었는데 그때 모습이 현재까지 남아있다. 

 

인정전
인정전과 선정전 사이.
인정전 내부.
왕의 집무실인 선정전 입구.

부용지와 주합루

후원의 첫 번째 중심 정원인데 그 당시 학문과 휴식을 겸할 수 있는 공개적인 장소였다고 한다. 사진에 보면 1층은 국사 시간에 많이 들었던 규장각, 즉 왕의 도서관이고 2층은 열람실이었다. 이곳은 지금은 출입금지이고 밑에서 올려다볼 수밖에 없다. 특이한 건 울타리가 돌이나 타일로 만들어져 있지 않고 대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책 읽다가 2층에서 내려다보는 부용지 뷰는 얼마나 멋졌을까 상상을 해봤다. 운 좋게도 창덕궁 관리소 사이트에서 주합루에서 부용지를 바라보는 사진을 찾았다. 보면서 와~ 이런 느낌이 구 나하는 대리 만족을 했다.(밑에 사진 참조)

 

 

부용지와 주합루
입구쪽에서 바라보는 부용지
주합루 입구. 대나무 울타리가 인상적이다.
영화당에서 바라보는 부용지
주합루에서 바라보는 부용지. 출처: 문화재청

영화당

이곳은 과거 시험 시 왕이 입회했을 때 머물렀던 곳인데 한쪽은 부용지를 볼 수 있고 다른 방향은 과거 시험을 볼수 있는 큰 마당이 있었다. 지금은 매점도 있고 화장실 건물이 차지하고 있지만 옛날에는 확 트인 공간이 있었다고 한다. 영화당은 문재인 대통령이 인도네시아 총리와 다과하던 자리이기도 하다. 신발 벗고 들어가서 직접 볼수 있는 이곳의 경치는 직접 내가 왕이 되어 볼수 있는 것처럼 너무 멋진 광경이었다.

 

영화당
영화당 내부에서 보이는 부용지.
옛날 과거시험을 봤던 영화당앞의 마당.

애련지와 의두합

1692년 숙종이 연꽃을 좋아해서 만든 애련지가 있다. 숙종이 이 연못을 '애련'이라고 지은 것은 '내 연꽃을 사랑함은 더러운 곳에 처하여도 맑고 깨끗하여 은연히 군자의 덕을 지녔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1827년에 효명세자는 애련지 남쪽에 연 두합이라는 몇 개의 건물을 지었다. 이 건물들은 궁궐 안에 있음에도 전혀 단청을 쓰지 않았다. 이 소박함이 효명세자를 잘 나타나지 않나 싶다. 그중엔 한 칸 반짜리 건물도 있다. 궁 안에 단청을 쓰지 않은 건물은 의두합, 낙선재, 그리고 연경당이다. 원래 자리는 아니지만 불로문이라는 게 의두합 근처에 서있는데 여기를 통과하면 늙지 않는다 하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시진핑 부인, 펑리위안과 트럼프 부인 멜라니아도 내한 때 여기를 지나간 적이 있다. 방문하게 되면 여기 한번 지나가 보시길.

 

애련지
의두합 입구
의두합
불로문 밑에 있는 한복입은 방문객

연경당

연경당은 효명세자가 아버지 순조에게 존호(임금이나 왕비의 덕을 기린다 하여 올리는 칭호)를 올리는 의례를 행하기 위해 1828년경에 창건했지만 지금의 연경당은 고종이 1865년쯤에 새로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사대부 살림집을 본떠서 만들기는 했지만 99칸이 나닌 120여 칸으로 만들어졌다. 이 건물 역기 의두합과 함께 단청이 건물에 없다. 연경당 안에 있는 건물 중 선향재라는 건물은 청나라풍 벽돌을 사용하고 동판을 씌운 지붕에 도드래식 차양을 설치하여 마치 요즈음 카페에 설치하는 어닝 같은 느낌을 주는 건물이다. 고종 이후 연경당은 외국 공사들을 접견하고 연회를 푸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연경당안에 고목이 벌써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마루를 통해 보이는 거목이 그동안 지난 세월을 알려준다.
그냥 보면 궁궐안에 있는 집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청나라풍 벽돌과 동판으로 만들어진 차양으로 지어진 선향재.
연경당 담너머에 피어있던 연분홍에 메발톱꽃
연경당 근처에 피어있던 보라색 칼라에 메발톱꽃.

옥류천

이번 창덕궁 방문에서 제일 좋아하는 장소인 옥류천이다. 내가 갔을 때 거의 사람들이 발길을 많이 가지 않는 곳인 것 같았다. 왜냐하면 한참을 걸어서 아주 북쪽 구석 외진 곳에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거기까지 귀찮아서 발길이 가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단체로 가이드와 함께 오면 당연히 가는 코스지만 이날은 개인이 자유로 갈 수 있었던 행운 덕에 같은 일행은 점심을 먹으러 가고 나는 홀로 이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들어가는 입구는 이 곳이 과연 종로 한복판인지를 잊게 해주는 길이였다. 새소리, 바람소리와 오직 풀냄새만 나니 꼭 어디 깊숙한 산속에 있는 느낌이고 앞뒤 아무도 지나가는 사람 없이 혼자 걷다가 문득 왕들이 여기를 지나갔을 거라고 생각하니 혼자 가슴이 벅찼다. 조선시대 왕들은 수백 년 후에 나 같은 일반 평민이 여기를 거닐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옥류천은 조그마한 정자가 여기저기 모여있는 축소판 정원이라고 하면 맞겠다. 청의정은 볏짚으로 지붕을 덮은 초가인데 원래 16채가 있었는데 유일하게 궁궐 안에 남아 있는 초가이다. 소요암에 위에 새겨진 옥류천이라는 세 글자는 인조의 친필이고 나머지 시는 이 일대의 경치를 읊은 숙종의 작품이라고 한다.

사진 찍으면서 유난히 예쁘게 나오고 떠나기 싫었던 농산정은 정조가 나라 일을 할 때 잠도 안 자고 식사도 거르면서 매진할 때 가끔씩 나와서 후원에 와서 정취를 즐겼었는데 정자중에서 특히 농산정에서 머물머 자기도 했다. 화성행궁 행차를 준비할 때 후원에서 혜경궁이 타고 갈 가마를 메는 연습 등을 한 후 농산정에서 신하들에게 음식을 대접한 곳도 농산정이다. 한참을 농산정 마루에 앉아 쉬다가 점심도 굶어 가며 온 길이 아주 보람된 시간이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뭔가 아쉬움을 떨치지 못하고 발길을 옮겼다.

 

옥류천가는 길.
청의정
소요암
태극정
농산정

낙선재
집에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들린 곳이 이 곳 낙선재이다. 아마 가장 많이 들어봤던 장소가 이곳이 아닌가 싶다. 낙선재는 원래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였고 석복헌은 경빈의 처소였다. 낙선재 역시 궁궐 안에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모습을 갖고 있는데 석복헌에서는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가 1966년까지 기거하였고 낙선재에서는 영왕의 비 이방자 여사가 1989년까지 생활하였다. 순정효황후는 우리나라 마지막 중전이기도 한 이분은 사대 대장부 같은 성품을 가지신 분이셨다. 1920년 한일합방 때는 몰래 옥새를 몰래 치마에 숨겨 내놓지 않으려고 했던 일, 그리고 아마 많이 들어봤을 이 일화는 유명하다. 한국전쟁 때 인민군이 낙선재에 들이닥치자 이 곳은 나라의 어머니가 사는 곳이라고 물리 친일이다. 1951년에 전세가 급박해 피난했다가 다시 돌아오려고 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환궁을 방해해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와 끈질긴 노력 끝에 다시 낙선재를 되찾아 영친왕 내외와 덕헤옹주를 한국으로 다시 데려오셨던 분이 순정효황후이시다.  마지막 황세손인 이구가 미국으로 유학을 갔을 때도 대한민국 국적을 주지 않아 임시 일본 국적을 가지고 갔었다고 하니 이승만 정부든 박정희 정부든 생전에 존재했던 정부들이 조선시대 황족에 대한 대우는 많이 아쉬운 부분이다.

 

낙선재
낙선재 방에서 보여지는 뒤뜰 모습.
낙선재 전경
뒤에 있는 상량정은 일반인이 출입할수 없다.

 

낙선재 뒤뜰
낙선재 뒤뜰에 있는 꽃이 기와와 같이 고풍스럽다.
낙선재에 있는 뒤뜰을 드나드는 문
낙선재 뒤뜰 계단에 피어있는 작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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